다수결은 근소한 차이일수록 다수의 독주를 줄이는 효과 초래
‘사회통합’ 운운하는 문형배의 독선은 ‘행정통합’의 이재명과 닮은꼴
정치는 관용, 자제 등 도덕과 무관하게 권력의 배분과 견제에 관련한 것
업무 폭증 때문에 재판소원 기각할 것이 아니라 각종 심급 판사 수 늘려야
문형배(전 헌법소장권한대행)는 다수결의 가치를 부정하며 사회통합을 지향한다. “자꾸 다수결을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다수결은 근소한 차이로 다수가 된 사람들의 뜻이다. 그것으론 사회통합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다수결로는 사회통합을 이룰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한겨레, 2026.4.3.) 다수결에 부정적인 그의 시각은 그가 낭독한 헌법재판소 윤석열 탄핵선고 결정문(2025.4.4.)에도 실려있다.
문형배는 다수결과 사회통합을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근원적 오류가 있다. 두 개념은 서로 같은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수결 아닌 것은 소수결이다. 또 사회통합의 대응 개념은 사회갈등, 혹은 지금 정부에서 음으로 양으로 추진하려 하는 행정통합에 반대되는 지역분권 등이다.
문형배가 지향하는 바의 사회통합은, 다수결 혹은 소수결 여부와 무관하다. 다수결이 반드시 분열이나 분권을 가져오라는 법이 없고, 소수결이 반드시 통합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국회 300인 소수 집단이 연출하는 바,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야 갈등이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다수결을 부정하는 문형배는 소수결을 통해서야만이 사회통합을 이룰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방정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체제 구분에 따르면, 민주정치는 다수의 정치이고, 소수결은 과두정치이다.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문형배는 민주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과두정치를 옹호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아니고 과두체제를 지향하는 것은 현행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문형배는 자신의 소수결, 과두정치적 이념을 ‘대의민주정치’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했다. 이것은 명백히 헌법을 오독한 것이다. 현행 1987년 헌법 제1조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의제’ 혹은 ‘대의민주정’의 원칙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문형배의 ‘대의민주제’ 주창은 1987년 헌법이 아니라, 그전 유신헌법에 뿌리를 둔 것이다. 유신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것은, 독재의 유신헌법에서조차도, 전적으로 대의제만 규정하지 않고, ‘국민투표’의 규정을 두었다. 막무가내 배타적 대의제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 그러하다.
그런데 문형배는 뜬금없이 한국의 민주정치를 대의제로 규정했다. 또 그는 ‘대의제’를 ‘민주적’이라 보았으나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유신헌법과 그 체제에서 대의제는 독재 및 과두 정치였다. ‘대의민주정치’라고 대놓고 떠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헌법은 제1조 2항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국민이란 다수를 말할 뿐, 그 중의 대의자 일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이가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무대가리로 독단적 해석을 도출하고 있다.
문형배가 다수결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수라는 것이 근소한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본 데서 기인한다. “자꾸 다수결을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다수결은 근소한 차이로 다수가 된 사람들의 뜻이다. 그것으론 사회통합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여기에서도 문형배는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한국에서 다수결은”이라고 전제를 단 것, 둘째, “근소한 차이로 다수가 된 것”이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고 본 것, 셋째, 사회통합을 절대선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 첫째, 다수결이 근소한 차이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으로 읽힌다. “한국에서 다수결은”이라고 한 것은 마치 한국의 민중(국민)이 민도가 낮아서 근소한 차이로 결론이 나는 것으로 이해(혹은 곡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사실은 딱히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근소한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다수표를 얻고서도 대통령이 못된 이가 있었다. 2000년대 미국 대선에서, 엘 고어(민주당)는 죠지 부시(공화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으나(48.4%:47.9%, 50,999,897표: 50,456,002표),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각 주에서의 득표를 선거인단으로 환산하는 독특한 방식에 의헤, 선거인단 확보에서 엘 고어가 266(49.34%): 271(50.37)로 5명 뒤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문형배가 말하는 바의, 근소한 차이가 다수결의 하자인가 하는 것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 총 득표율에서 이겼는데도 패자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위 둘째, 문형배는 “근소한 차이로 다수가 된 것”을 다수결의 하자로 보았으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표차가 근소할수록, 다수쪽이 독재하지 못하고, 반대쪽 혹은 중도를 포섭하려 노력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표가 바로 반대쪽으로 넘어가버려 필히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반면, 서로 표차가 많이 벌어지는 경우, 오히려 다수쪽이 독주하게 된다. 중도표가 다소간 넘어가도 여전히 다수표를 확보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으로 전망될 터이기 때문이다.
문형배가 이해한 바와 달리, 표차가 근소할수록 다수를 득한 쪽이 독주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문형배가 지향하는 타협, 상대에 대한 다소간의 관용이 표차가 근소한 다수결에서 담보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다. 민주정치는 다수결의 표차가 근소할수록 더욱 원만하게 작동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위 셋째, 문형배는 사회통합이 ‘묻지마’식의 절대선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대통령 이재명이 극구 추진하려 하는 행정통합을 소환하게 한다. 사회통합, 혹은 행정통합을 지향하는 이 두 사람은 두 가지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첫째, 다른 무엇보다 통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둘째, 왜 다른 것보다 통합이 좋은 것인지, 설득력 있는 아무러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 두 사람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통합을,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어도 좋은 자명한 공리라고 보기 때문이 아니라면, 저렇듯 용감하게 통합의 기치를 올리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문형배는, 결과적으로 소수결을 통해 ‘사회통합’을 하고자 한다. 결국 문형배가 사회통합을 지향한다는 것은, 다수 의사를 무시하고 소수결에 의해 사회를 획일화하겠다는 뜻이다. 다수결 아닌 소수결에 의해 사회를 획일화하는 것을 독재라고 하는 것이다.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문형배의 이 같은 독선은 대통령 이재명의 판박이이다. 이재명은 「충남의 마음을 듣다」(2026.3.13.)에서 행정통합을 종용했다. 경제 광역화는 ‘연합’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만, ‘통합’이 더 바람직하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선진의 유럽연합에서는, 경제광역화는 행정통합과 무관하게, 지역 간 ‘연합과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형배의 ‘대의민주정치론’은 철저하게 국민 민중을 을로 간주한 배타적 엘리트 관료주의를 노정한다. 두 가지 사례가 그 사실을 방증한다. 첫째, 그가 관용, 자제, 대화, 여야 타협, 대의민주주의, 통합, 주체(국민 민중이 아니고 국회의 여야) 간 협력 등을 담론으로 제시한 것이다. 둘째, 헌법재판소 재판소원 괸련하여, 헌재가 과부하가 걸리지 않으려면, 재판소원으로 오는 사건의 상당수를 각하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위 첫째 관련하여, 문형배는,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사회통합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주체 간의 협력이 되었을 때 해결할 수 있다”, “협력은 관용과 자제 없이는 안 된다”, “관용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 “자제는 힘 있는 사람이 권한 행사에 신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불문하고. 자제하고 관용하지 않았을 때에 대한 대책이 문형배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정치는 관용과 자제 같은 미덕과 도덕을 종용하는 장(場)이 아니고, 권력의 배분에 관련한 것이다. 특히 민주정치는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 민중이 최종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민중은 대의자에게 종속된 하수인이 아니다.
문형배는, “공론의 장을 토대로 관용과 자제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국회와 정부 사이, 국회와 사법부 사이, 여야 간에 필요한 것”, “정치는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민주주의로서 모든 국민을 대변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들끼리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의 의사가 입법에 반영되고, 민주주의가 진화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 헌법이 애초에 대의민주정치를 규정한 것으로 잘못 판단한 문형배의 ‘논썰(설)’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틀렸다. 문형배에게서, 국민 민중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정치(가)가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배반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들끼리 대화, 타협하는 것’만으로 민주정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의제는 편의적인 것이고,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서, ‘국민’이 궁극적 권위를 가진 것이 민주정치이다. 그 제도적 장치를 근 40년 만의 개헌에서 마련해야 한다.
둘째, 헌법재판소 재판소원 괸련하여 문형배는 주객을 전도했다. 헌재가 과부하가 걸리지 않으려면, 재판소원으로 오는 사건의 상당수를 각하해야 한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재판관 관료의 업무량에 맞추어 다루는 사건의 수를 임의로 조절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문형배는 국민 민중을 ‘을’로 취급했다.
현재 한국의 재판이 1심, 2심 등 사실심에서 부실하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회자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형배는 1, 2심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법관 수를 늘리고, 판사가 재판을 잘못하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말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업무가 폭증하면, 거기에 맞추어 판사 인력을 늘이면 된다. 문형배는 연구관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고 했으나, 실은 판사 수 자체를 늘려야 한다. 1, 2심에서는 물론 대법원, 헌법재판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정이 문제가 되어 정규직을 다 쓸 형편이 안 되면, 비정규직 판사를 쓰면 된다.
판사 수가 고정돼야 하거나 사건수에 비해 턱없이 적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건에 따라 늘리거나 줄이면 될 일이다. 막중한 교육에도 비정규직 교사, 강사 등을 쓴다. 중, 고, 대학을 막론하고 그러하다. 학생수에 따라 교사 수가 증감하듯, 사건 수에 따라 판사 수가 증감해야 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재판소원을 기각할 때는 판결이 하자가 없을 때여야 한다. 문형배가 판사 업무가 가중되니 사건을 기각시켜야 한다는 것은 관성에 찌든 관료 편의주의적 발상이며, 사법 피해에 허덕이는 국민 민중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나아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문형배가 범한 치명적 오류는 의견 자체보다 민주적 절차를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민 민중에 의한 다수결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형배는 현행 헌법을 왜곡했다. 헌법 정신은 문형배가 말하는 관용과 자제가 아니라, 민주적 다수결에 있다.
문형배류의 헌법을 오독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결정내리는 것 자체가 국민 민중에게는 위험천만한 악재이다. 이들 헌법재판관을 견제하고 수정할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9명의 헌법재판관은 무오류의 신이 아니다. 9명 임몀직 관료가 국민이 선출한 300인 국회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 어디에도, 필자가 견문한 한, 없다.
또 문형배와 같이 관료주의적 사고에 절은 이들에게 사법제도의 개선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국민 민중이 스스로 필요한 만큼 개혁에 나서야 하며, 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 국회를 위헌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겠다. 정치는 국회, 혹은 임의단체로서의 여야 정당의 배타적 전유물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