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빛의 혁명은 자랑 아닌 대한민국의 수치
주민투표 대신 지역의회와 국회 결정으로 대신하자는 김경수
광주⸱전남에서는 지역의회도 무시하고 국회에서 우선 입법
‘입틀막’ 당한 주민, 국민은 언제나 길거리 아스팔트 ‘노가다’
김의영(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등 각국 정치학자 4명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대한민국 시민 전체'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한다. 추천서에서 이들은 12.3 비상계엄을 저지한 시민들의 노력을 '빛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헌법적 위기에 직면한 한국 사회를 법치와 시민 참여, 절제된 비폭력에 기반해 수호했다는 점을 추천 사유로 꼽았다.
이에 대통령 이재명이 "인류사의 모범이 될 위대한 대(大) 한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은 한다" 등 글을 올렸다. 이미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1주년 당시 그는, "비무장 국민의 손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쿠데타를 막아낸 것 역시 세계 역사상 최초였다", “우리 국민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몇 가지 반성이 필요하다, 첫째, 정치학자 4명은 ‘법치와 시민 참여’가 헌법적 위기에 직면한 한국 사회를 수호했다고 했으나, 촛불혁명의 시민 참여는 법치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법을 벗어난 ‘법외적(法外的)’ 현상이다.
윤석열이 법을 위반하니, 시민들도 법이 규정하지 않는 제도 바깥의 실력행사로서 촛불을 든 것이다. ‘법치와 시민 참여’가 헌법을 수호한 것이 아니라, 법을 벗어난 실력행사를 통해 오히려 쿠데타를 막고 위기에 처한 헌법을 수호한 것이다.
둘째, 이재명은 "비무장 국민의 손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쿠데타를 막아낸 것“이라고 했으나, 촛불혁명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처절한 것이었다. 그 처절한 촛불, 빛의 혁명이 ‘역사상 최초’라고 했는데, 그 뜻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거나,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없는 일이 왜 한국에서는 일어날까에 대한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나간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른바 ‘빛의 혁명’은, 이재명이 미화하는바, "인류사의 모범이 될 위대한 대(大) 한국민의 나라”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미개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시민 민중의 정치적 의사 개진의 절차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수틀리면 무작정 거리로 나서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4명과 이재명의 빛의 혁명 찬양론이 내포하는 독소는 현재의 상황을 화석화하고, 더 이상의 제도적 장치 개선의 여지를 매몰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촛불을 들고 나오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 ‘빛의 혁명’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이다. 수치스러운 것도 모르는 정치학자, 대통령, 국민 시민들이 있는 한, ‘아름답지’ 않고 수고스럽기만 한 촛불혁명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다.
이런 수고를 아끼자면, 생각과 제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첫째, 헌정체제를 뒤엎으려는 시도가 감지되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사전에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제도적으로 막을 수도 있고, 또 제도를 벗어난 ‘제도외적(制度外的)’ 방법도 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죄다 일이 발생한 연후가 아니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것으로는, 우리가 뽑은 사람이 헌정질서를 엎을 수도 있겠다는 심증이 들면, 합법적으로 다시 투표하여 축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므로,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아니고, 사전적 예방조치이다. 그래서 증거 없이 낌새만 가지고 축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선출하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적시에 축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도록, 국민투표 발안권(투표하자고 제안할 권한)과 부의권(附議權: 투표에 부치는 권한)을 국민이 직접 가져야 한다. 다소간에 여야 짬짜미하고 정략적으로 돌아가는 국회만 믿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법을 어긴 조희대도 하나 감당 못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제도외적인 것으로서는, 12.3 내란 발생 후에 하는 촛불혁명이 있는데, 그것은 사후의 것이므로 이미 다소간 피해가 발생한 상태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시민들은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을 알았다. 혐의가 있는 이를 미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치는 행정부, 사법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이 민회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혐의자를 죽이는 것도 시민 개인이 나서서 했다.
기원전 4세기 변론가 리쿠르고스(1.126.)에 전하는 고전기 아테네의 법 조문을 참조할 수 있겠다.
“그 같은 수작을 모의하는 것만 보아도 그런 이들을 죽여버릴 것이라고 그들은 선서했어요. 타당한 것이죠. 다른 부당행위들은 실행되고 난 다음에야 처벌하도록 했지만, 배반과 민주정체의 전복은 사전에 벌하도록 했어요. 조국을 해치려고 획책하는 이들을 보고도 시기를 놓치면, 여러분은 사후에 부당행위자들을 잡아 재판에 회부할 수가 없어요. 그들이 이미 더 강해져서, 피해 본 이들이 그들을 재판에 회부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정치는 법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이다. 민주는 정치 영역에 있는 것이지, 사법부나 재판관에게 머리 숙이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는 궁극적 권력의 원천이기에, 헌법과 사법부 위에 군림한다. 입법부도 국민투표의 관할하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입법부가 ‘대의 민주’라는 허울 아래, 국민을 수하의 종 보듯 하면, 그것은 민주가 아니라 ‘대의 과두’의 정치가 된다.
행정부가 국민을 우습게 알고, 국회는 물론 지역의회 등 대의기구를 국민 위에 올리려 하고 있다. ‘지방시대위원장’이라고 하는 이름도 무색하게, 김경수가. 목하 지역 행정통합을 종용하면서, “비용이 많이 드는 주민투표를 구태여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여론조사로 대신하고, 지역의회에서 결정하고,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행정통합을 추진하면 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김경수는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주로 '주민투표를 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첫째, 비용 때문에 주민투표 대신 여론조사로 대신하자고 한 것, 둘째, 위정자 자신의 의견을 여과장치 없이 바로 제도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니, 이는 독재적 근성이다.
위 첫째, 비용 문제 관련하여 재정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국회에서 결정하고, 그 국회의 결정에 문제가 있으면, 그 위에 국민이 제도적으로 감독,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주민투표가 돈이 많이 들어 못하는 것이라면, 거액이 들어가는 국민투표도 할 필요가 없다. 박정희, 전두환 때처럼,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간접선거체제로 대통령 뽑으면 된다. 돈 들어가고 비리 난무한 국회도 설치 운영할 필요가 없다. 영민하고 유능한 이재명이 다 알아서 결정하면 된다. 시간도 절약되고 돈도 안 들어가는 방법은 박정희식으로 독재하는 것이다.
위 둘째, 주민투표 하지 말고 지역의회와 국회 결정으로 대신하자는 김경수의 발언은 민주적 절차를 유보 없이 짓뭉개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 의견 제시가 아니라, 이미 전개되는 현실이다. 심지어 광주⸱전남에서는 지역의회도 무시하고 국회에서 먼저 입법하여, 거꾸로 지역의회의 동의를, 그다음 수순으로 얻어냈다.
딱 거기까지이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투표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김경수뿐 아니라, 현 정부(행정, 입법 공히) 자체가 주민의 뜻은 무시해도 된다고 본다는 사실이 이런 행보를 통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춧불, 빛의 혁명은 그래서 ‘노가다(막일꾼)’같이 하고한 날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주민, 국민 뜻을 반영할 수 있는 길이 애초에 이런 식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을 거론할 것도 없이, 현 정부에서 그러하다. ‘노가다’식 의견 표출 방식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빛의 혁명’으로 미화되는 촛불혁명은 한국의 제도와 의식(위정자, 민중 공히)의 비민주적 상태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그래서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다.
비용이 드니 주민투표 하지 말고, 지역의회와 국회가 대신하자는 김경수의 발언은 헌법재판소 재판소원제에 반대하는 조희대(대법원장), 천대엽(전 대법원 행정처장) 등의 복사판이다. 조희대, 천대엽 등은 재판소원제가 오히려 소송 지옥을 만들 것, 재판의 지연을 초래하고 국민의 소송비용 부담을 증가시킬 것 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조희대, 천대엽 등도 김경수와 같이 월권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들은 사법부 소속이고 입법부가 아니다. 사법부란 법을 제정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법은 입법부에서 만든 기존의 법에 어떤 행동이 저촉되는지 여부만 밝히면 되는 것이고, 법 제도를 만들거나 혹은 만들지 못하도록 방해할 권한이 애초에 없다. 사법부의 간덩이가 부어터져서, 입법부를 좌지우지하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들의 행태에서 목도할 수 있다.
이들은 각종 비용 문제를 들고나와, 권력 간 견제와 감시, 나아가 권력에 대한 국민의 감시를 무력화하고자 한다. 핵심은 권력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비용이 아니다. 비용이 들어가니 감시체제를 없애자고 하는 것은 온갖 독재에 준동의 길을 터주는 것이다.
김경수는, 지역의회와 국회를 내세워, 지역주민 및 국민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 김경수의 발언은 김민석(총리) 및 이재명의 뜻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재명은 2월에 국회에서 입법하고 6월 지방선거에 통합단체장을 뽑자고 서둘렀고, 김민석도 각 지역 및 국회를 찾아 이 같은 것을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조직의 근간을 흔드는 지역단체장 통합을 여야가 합십하여 졸속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노라면, 춧불, 빛의 혁명을 높게 치켜세우는 이들의 단세포적 시각에 대한 반성이 불가피하다. “비무장 국민의 손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쿠데타를 막아냈다”는 말을 주문같이 외우며 자위(自慰)할 것이 아니며, "세계 역사상 최초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첫째, 비무장으로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미국같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으로라도 무장을 해야 한다. 둘째. 쿠데타는 ‘평화롭고 아름답게’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한다. 셋째, 쿠데타는 사후가 아니라 사전에 예방해야 하고, 그것은 행정부(경찰, 검찰)나 사법부(판사) 혹은 권력투쟁에 매몰된 입법부가 아니라 궁극적 권력의 원천인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전기 아테네 변론가 리쿠르고스를 통해서 전하는바, 위 아테네 법 조문(1.126.)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